신 없는 신학 — 에필로그: 제사장들의 시대
epilogue
Epilogue

신 없는 신학 — 정치는 종교를 떠난 적이 없다

제사장들의 시대

담론 생태계가 스스로를 신학화하는 방식에 대한 관찰

관찰 담론 생태계 미완의 물음
모든 시대는 자기 시대에 걸맞은 신학을 갖는다.
우리 시대의 신학은 플랫폼 위에서 스스로를 업로드한다. — 필자 주

이 시리즈는 하나의 해석틀을 제안했다. 종교와 정치가 개념적으로 분리된 이후에도, 그 분리는 기능적 구조의 수준에서는 완성되지 않았다는 것. 성스러운 계보, 이단 지목, 희생양, 내재화된 종말론 — 이 구조들은 신을 호명하지 않아도 계속 작동한다는 것.

그런데 이 시리즈를 마치고 나서 남는 것이 있다. 분석이 그려낸 것보다 현실이 한 발 더 나아가 있다는 느낌이다. 문제는 신학적 구조가 정치 안에서 작동한다는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대항하는 방식 자체가 동일한 구조를 택한다는 데 있다. 그리고 그 순환을 가속하는 새로운 조건이 생겼다. 플랫폼이다.

I

대항담론의 신학화 — 예측 가능한 귀결

신학적 언어로 구성된 정치적 공격에 대응하는 가장 빠른 방법은 대칭적인 신학으로 응수하는 것이다. 논증보다 빠르고, 공동체를 즉각 결속시키며, 감정적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는다. 이 경로는 의식적인 선택이 아니라 담론 생태계의 마찰 최소화 법칙에 따른 자연 선택에 가깝다.

결과적으로 신학적 공격은 신학적 방어를 낳고, 그 방어는 다시 공격이 된다. 담론장 전체가 신학적 언어로 포화되는 것은 어느 한 진영의 의도가 아니라, 이 상호 강화의 구조가 낳는 창발적 결과다. 비판이 타당할수록, 역설적으로 그 비판이 촉발하는 대항 에너지도 더 신학적이 된다. 분석이 현상을 해소하는 것이 아니라 현상을 더 선명하게 드러내는 것에 그치는 이유가 여기 있다.

II

알고리즘이 제사장 지위를 수여한다

중세에는 교황청이 제사장의 권위를 인증했다. 20세기에는 신문사와 방송국이 논평자의 권위를 부여했다. 오늘날 그 기능은 플랫폼 알고리즘이 수행한다.

알고리즘이 증폭하는 콘텐츠의 공통 속성은 잘 알려져 있다. 감정적 강도, 정체성 확인, 적의 명확한 지목, 우리가 옳다는 반복적 확인. 이것은 앞선 편들에서 살펴본 신학적 구조의 요소들과 거의 완전히 겹친다. 알고리즘은 신학적 언어를 선호하도록 설계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신학적 언어가 알고리즘이 선호하는 속성들을 자연스럽게 충족한다. 두 구조의 우연한 정합(整合)이 오늘날 담론 생태계를 만들었다.

인플루언서가 제사장의 지위를 획득하는 것은 그들이 권위를 주장하기 때문이 아니다. 플랫폼이 그들의 콘텐츠를 제사장적 형식 — 성스러운 것과 불순한 것을 구분하고, 공동체의 감정을 조율하며, 적을 지목하고 결속을 강화하는 — 에 가장 잘 맞는 것으로 선별하기 때문이다.

이 구조에서 숙의적 담론은 구조적으로 불리하다. 숙의는 느리고, 양가적이며, 감정적 쾌감을 제공하지 않는다. 알고리즘은 숙의를 억압하지 않는다. 다만 숙의가 바이럴하지 않다는 이유로 조용히 묻어둘 뿐이다.

III

숙의를 시도하는 정치 시스템의 딜레마

이 맥락에서 토론과 참여, 숙의를 통해 갈등을 해결하려는 정치적 시도들을 바라보면 묘한 긴장이 감지된다. 그 시도 자체는 이 시리즈가 말한 "덜 위험한 방향"에 가깝다. 문제는 그 시도가 이루어지는 담론 환경이다.

숙의 과정의 결과는 그것을 수용하는 담론 구조의 층위에서 해석된다. 신학화된 담론 구조 안에서, 숙의의 결과는 그 내용보다 그것을 생산한 주체의 소속이 먼저 판단된다. 같은 결론이라도 어느 계보가 도달했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것으로 수용된다. 제도가 담론 구조보다 느릴 때 생기는 층위 불일치다.

구체적인 사례가 있다. 공개 국무회의나 공청회 방식의 숙의 절차가 실질적 지지를 얻는 이유는, 조직화된 정치집단들이 헤게모니 다툼을 반복하면서 결착 없이 갈등만 재생산하던 구조와 대비되기 때문이다. 숙의가 느리고 알고리즘에 불리하다는 일반론이 적용되지 않는 국면이다. 절차가 가시화되고 결과가 누적될 때, 숙의는 다른 종류의 정당성을 획득한다.

이 국면에서 진영 내부의 일부 담론이 다시 부상할 때, 그것을 단순한 노선 갈등으로 읽는 것은 충분하지 않을 수 있다. 현 정부에 대한 공고한 지지 구조가 구 주류의 정치적 복귀를 가로막고 있다는 인식 아래, 담론의 축 자체를 제도 설계나 공적 이익의 배분 문제에서 신학적 색채를 띤 노선 투쟁으로 전환하려는 시도가 그 안에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노선의 언어를 빌렸지만, 그 안에서 작동하는 것은 계보의 문법이다.

대항담론의 신학화는 때로 의도된 전략이기도 하다. 숙의의 성과를 계보의 언어로 덮는 것 — 그것이 성공하면, 성과는 소음 속에 묻히고 갈등만 남는다. 알고리즘은 그 소음을 증폭하는 데 최적화되어 있다.

이것이 해결 불가능한 딜레마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해소되는 경로는 제도 설계의 정밀함보다는 시간의 누적에 더 많이 의존할 가능성이 높다. 신학적 담론이 스스로 소진되거나, 그것이 약속한 결과를 반복적으로 산출하지 못하거나, 그 에너지를 소비했던 세대가 피로를 느끼거나. 역사적으로 담론 구조의 층위 이동은 대체로 이런 방식으로 일어났다.

제도가 담론을 바꾸는 것보다,
담론이 스스로 소진되기를 기다리는 편이
더 현실적인 경우가 많다.
그것이 낙관도 비관도 아닌, 다만 역사의 패턴이다.
IV

그렇다면 이 해석틀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이 시리즈가 처음부터 지향한 것은 처방이 아니라 관조였다.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일어나는 일이 어떤 구조 위에서 일어나는지를 조금 더 선명하게 볼 수 있는 언어를 갖는 것.

그 언어가 있으면 무엇이 달라지는가. 아마도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신학적 담론은 계속 작동하고, 알고리즘은 계속 제사장을 선별하며, 대항담론은 계속 대칭적인 구조를 택할 것이다. 그 흐름을 해석틀 하나가 바꾸지는 않는다.

다만 한 가지는 달라질 수 있다. 그 흐름에 휩쓸리면서도 그것이 흐름임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 사이의 거리. 담론의 파도 속에 있으면서도 그것이 파도임을 볼 수 있는 것. 그것이 이 해석틀이 줄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것이다.

거창한 말로 표현하면 관조적 거리감이고, 소박하게 말하면 한 걸음 물러서는 습관이다. 누군가의 발언이 분노를 일으킬 때, 그 분노 자체를 잠시 들여다보는 것. 지금 내 안에서 무엇이 신성화되고 있고, 무엇이 이단으로 처리되고 있는지를 느끼는 것. 그것이 분노를 소멸시키지는 않는다. 그러나 분노와 나 사이에 아주 얇은 공기층 하나를 만들어줄 수는 있다.


이 시리즈를 쓰면서 내내 의식한 것이 하나 있다. 이 글 자체도 하나의 담론이고, 담론은 그것이 분석하는 구조로부터 자유롭지 않다는 것. 종교적 구조를 분석하는 글이 그 분석을 통해 또 하나의 권위를 주장하는 아이러니로부터 이 글 역시 완전히 벗어나 있지 않다.

그것을 알면서 쓴다. 불완전한 언어로 불완전한 것을 가리키는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리고 그 불완전함 자체가 이 글이 말하려 한 것의 일부이기도 하기 때문에.

담론은 흐른다.
제사장들은 교체된다.
구조는 남는다.

그것을 아는 사람들이 조금씩 더 많아지는 것,
그것으로 충분할지도 모른다.
아니면 충분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든, 일단 보이는 것부터 시작이다.

신 없는 신학 — 정치는 종교를 떠난 적이 없다 · 에필로그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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