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없는 신학 — 2부: 분리는 발견이 아니라 발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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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Two

신 없는 신학 — 정치는 종교를 떠난 적이 없다

분리는 발견이 아니라
발명이었다

30년 전쟁이 만들어낸 개념, 식민주의가 수출한 범주

개념사 근대 유럽사 비판적 종교학
종교는 사적 영역이고, 국가는 공적 영역이다. — 존 로크, 『관용에 관한 편지』(1689) · 이것은 발견된 진리가 아니라, 전쟁을 끝내기 위해 만들어낸 정치적 해법이었다

1648년 10월, 30년간 유럽을 피로 적신 전쟁이 끝났다. 베스트팔렌 조약이 체결된 그 해, 유럽의 협상가들은 알지 못했을 것이다. 자신들이 단순히 전쟁을 종식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개념적 혁명 중 하나를 수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종교는 개인의 문제다"라는 근대적 명제는 철학자의 서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수백만 명이 죽은 전쟁터의 폐허에서 나왔다.

1부에서 우리는 로마의 religio가 처음부터 공적·정치적 범주였음을 확인했다. 중세 기독교 세계에서도, 이슬람 전통에서도, 신성한 권위와 세속 권력은 분리된 두 영역이 아니라 하나의 통합된 질서 안에 있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에게 자명해 보이는 "정교분리"는 언제, 어디서, 어떻게 등장했는가. 그리고 그것은 정말로 보편적 원리인가.

I

30년 전쟁 — 분리의 필요성을 강제한 재앙

1618년에 시작된 30년 전쟁은 표면적으로는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의 신학 논쟁에서 비롯됐지만, 그 실상은 훨씬 복잡한 권력 투쟁이었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권, 독일 제후들의 자치권, 프랑스와 스웨덴의 세력 확장 욕구가 신앙의 언어로 포장되어 뒤엉켰다. 결과는 처참했다. 독일 일부 지역은 전체 인구의 3분의 1을 잃었다. 도시는 불탔고, 역병이 퍼졌으며, 먹을 것이 없어 사람이 사람을 먹는 일이 기록되었다.

이 전쟁이 남긴 가장 중요한 질문은 신학적인 것이 아니었다. "어떻게 하면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할 수 있는가." 그 답으로 협상가들이 도달한 것이 하나의 실용적 원칙이었다. 신앙의 문제를 정치적 갈등의 원인으로 삼지 않기 위해, 신앙을 공적 영역에서 걷어내는 것.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은 이 원칙을 국제 질서의 기초로 정착시켰다.

1517

루터의 95개 논제. 종교개혁의 시작. 단일한 서방 기독교 세계의 균열이 시작된다. 이후 한 세기, 유럽은 신앙의 이름으로 내전을 반복한다.

1618–1648

30년 전쟁. 독일 지역 인구의 최대 1/3이 사망. 가톨릭과 개신교 진영의 전쟁이지만, 가톨릭 프랑스가 개신교 스웨덴과 손잡는 등 신앙보다 권력 논리가 우선하는 아이러니가 반복된다.

1648

베스트팔렌 조약. "각 영주는 자신의 영토 내에서 종교를 결정할 권리를 가진다." 종교를 국가 행정의 관할 사안으로 배정하는 동시에, 개인의 양심에 일정한 보호를 부여한다. 근대적 정교분리 원칙의 원형.

1689

로크의 『관용에 관한 편지』. 베스트팔렌 체제의 실용적 타협을 철학적 원리로 격상시킨다. "국가의 관심사는 시민의 재산과 안전이지, 영혼의 구원이 아니다."

18세기

계몽주의. 로크의 해법이 보편적 이성의 명령으로 재포장된다. 정교분리는 이제 특정 전쟁의 해법이 아니라 "이성적 사회의 자명한 원리"로 선언된다.

핵심 전환

베스트팔렌 이전: 종교가 정치적 충성의 기준이었다. 베스트팔렌 이후: 종교는 정치적 갈등의 원인이 되어서는 안 되는 사적 사안이 되었다. 이것은 진리의 발견이 아니라, 대량 학살을 멈추기 위한 집단적 결단이었다.

II

로크의 논리 — 신학이 아니라 정치공학이었다

존 로크의 『관용에 관한 편지』(1689)는 정교분리의 철학적 정초로 자주 인용된다. 그러나 이 텍스트를 면밀히 읽으면, 그것이 종교의 본질에 대한 신학적 통찰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철저히 정치적 논증임을 알 수 있다. 로크의 핵심 주장은 이것이다: "국가는 물리적 강제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신앙은 강제로 바꿀 수 없다. 따라서 국가가 신앙에 개입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무효이며, 정치적으로 해롭다."

이 논증은 "신앙은 원래 사적인 것"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하지 않는다. 오히려 "종교를 공적 영역에서 다루는 것이 가져오는 폐해"라는 실용적 판단에서 출발한다. 30년 전쟁의 기억이 채 식지 않은 시점에서 로크가 쓰고 있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의 관용론은 신학적 진리에 대한 성찰이 아니라, 종교를 공적 갈등의 원천에서 제거하려는 정치적 처방이었다.

Locke
존 로크 · 관용에 관한 편지 · 1689
"국가의 권한은 시민적 이익을 위한 것이다"

로크는 국가와 교회를 두 개의 "완전히 다른 사회"로 규정했다. 국가는 생명, 자유, 재산을 보호하는 기구이고, 교회는 영혼의 구원을 추구하는 자발적 결사체다. 이 구분은 형이상학적 주장이 아니라 기능적 분업의 제안이었다. 그리고 이 제안의 숨겨진 전제는, 두 기능을 하나의 기구에 맡겼을 때 발생하는 재앙을 유럽이 막 경험했다는 것이다.

로크가 놓친 — 혹은 의도적으로 회피한 — 것이 있다. 신앙을 사적 영역으로 이전하는 것 자체가 중립적인 행위가 아니라는 점이다. 어떤 신앙 전통들, 특히 공적 실천과 공동체적 의례를 신앙의 본질로 여기는 전통들에게, "신앙은 개인의 내면적 사안"이라는 전제 자체가 이미 하나의 특수한 신학적 입장을 강요한다. 로크의 관용론은 모든 종교에 평등하게 적용되는 중립적 원칙이 아니라, 특정 종류의 기독교 — 루터파적, 내면화된 신앙 이해 — 를 종교의 표준으로 삼은 편향된 원칙이었다.

"종교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원칙 자체가,
이미 종교가 무엇인지에 대한 편향된 정의를 내장하고 있었다.
III

계몽주의의 보편화 — 해법이 진리로 둔갑하다

18세기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로크의 정치적 해법을 더 거대한 서사 속에 배치했다. 정교분리는 이제 특정 전쟁의 교훈이 아니라 이성이 도달한 보편적 문명의 원칙으로 선언되었다. 볼테르는 종교적 광신을 인류 진보의 최대 적으로 규정했고, 루소는 세속적 시민 종교(religion civile)를 통해 종교의 기능을 국가가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과정에서 결정적인 인식론적 이동이 일어났다. "정교분리는 유럽이 특수한 역사적 조건 속에서 채택한 해법"이라는 자기 인식이 사라지고, "정교분리는 이성적 사회라면 당연히 도달하는 보편 원리"라는 확신이 그 자리를 대체했다. 이 확신은 이후 식민주의와 결합하면서 지구적 규모의 개념 폭력으로 증폭된다.

IV

식민주의의 범주화 — 힌두교는 어디서 왔는가

오늘날 우리가 당연하게 사용하는 단어들을 생각해보자. 힌두교(Hinduism), 불교(Buddhism), 유교(Confucianism), 도교(Taoism) — 이 단어들은 해당 전통이 자기 자신을 가리키기 위해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대체로 18~19세기 유럽의 학자들과 식민 행정관들이 서양의 religion 개념을 기준으로 비서양 세계의 실천들을 분류하면서 만들어낸 범주들이다.

"힌두교"라는 단어가 인도에서 하나의 통일된 종교를 가리키는 단어로 정착한 것은 주로 영국 식민 통치 시기의 일이었다. 그 이전 인도 아대륙의 다양한 신앙·의례·철학 전통들은 dharma(法·道)라는 더 광범위하고 유동적인 개념 아래 놓여 있었다. 이것들을 "힌두교"라는 단일 종교로 묶는 작업에는 식민 행정의 필요가 있었다. 인구를 종교별로 분류하고 관리하기 위해서였다.

식민지 범주 서양어 명칭 형성 시기 원래 자기 지시어
힌두교 18~19세기 영국 식민기 dharma · 특정 단일 명칭 없음
불교 19세기 유럽 동양학 Buddha-dharma · Sangha · 각 전통마다 상이
유교 예수회 선교사들 (17세기~) 儒學(유학) · 儒敎는 후대 반영된 표현
신토 메이지 시기 일본 국가 재편 중앙집권화 이전 분산된 지역 의례들

범주화 자체가 중립적이지 않다. "이것은 종교"라고 분류하는 행위는 동시에 그것을 정치·법·통치로부터 분리하는 행위였으며, 식민 통치의 공적 영역과 충돌하지 않는 사적 사안으로 만드는 작업이었다.

이 범주화의 정치적 함의는 명확하다. "이것은 종교다"라는 선언은 동시에 "이것은 공적 영역의 문제가 아니다"라는 선언이었다. 식민지 인민의 신앙 실천, 의례, 공동체 규범들을 "종교"로 분류함으로써, 식민 당국은 그것들을 자신이 관장하는 공적·정치적·법적 영역과 무관한 사적 사안으로 처리할 수 있었다. 종교의 자유를 허용한다는 것이 실은 지배에 저항하는 공동체적 힘을 사적 영역으로 격하시키는 통치 기술이기도 했다.

V

비판적 종교학의 반격 — 아사드와 스미스

Asad
탈랄 아사드 · 종교의 계보학 · 1993
religion이라는 범주 자체를 해체하다

탈랄 아사드는 "종교란 무엇인가"를 정의하려는 종교학의 시도 자체가 이미 서양 근대의 권력 관계를 전제하고 있다고 논증했다. 보편적인 "종교 경험"이나 "신성한 것"이 따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무엇이 종교이고 무엇이 아닌지를 결정하는 권력이 존재할 뿐이다. 그 권력이 근대 서양 세속 국가였다.

Smith
윌프레드 캔트웰 스미스 · 종교의 의미와 종말 · 1962
"종교들"이라는 복수형은 근대의 발명이다

스미스는 "힌두교", "불교", "이슬람교"처럼 명사형으로 고정된 종교 개념들이 역사적으로 매우 최근의 산물임을 보였다. 사람들이 살아온 신앙 전통은 원래 그런 경계 지어진 체계가 아니었다. 그것들을 고정된 -ism으로 묶어내는 작업이 서양 근대 학문과 식민 행정이 함께 수행한 분류 작업이었다.

아사드와 스미스의 작업이 공유하는 통찰은 이것이다: religion이라는 개념은 중립적인 관찰 범주가 아니라 특정 역사적 맥락에서 특정 목적을 위해 구성된 범주다. 그리고 그 목적은 결코 순수하게 학문적이지 않았다.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한 정치적 필요, 식민지를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한 행정적 필요, 계몽주의적 이성의 우월성을 입증하기 위한 문명론적 필요가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정교분리는 인류가 발견한 진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유럽이 자신들의 특수한 역사적 재앙 — 종교전쟁 — 에서 탈출하기 위해 발명한 해법이었고, 그 해법이 계몽주의의 언어로 보편화되었으며, 식민주의의 힘을 빌려 전 세계에 이식되었다. 그 이식의 과정에서 비서양 세계의 다양한 삶의 방식들은 "종교"라는 범주 안에 강제로 배치되어 공적 영역에서 추방당했다.

이것은 단순한 역사적 흥밋거리가 아니다. 오늘날 전 세계에서 벌어지는 "종교와 정치의 충돌"처럼 보이는 현상들의 상당수는, 사실 이 강제 이식된 범주 체계에 대한 저항으로 이해할 때 비로소 설명된다. 그들이 종교를 정치 영역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라, 원래 분리된 적 없었던 것을 인위적으로 분리하려는 시도에 저항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더 근본적인 질문이 남는다. 정교분리가 역사적 구성물이라면, 그 분리 이후 정치는 종교 없이 작동하기 시작했는가. 아니면 종교의 기능은 사라진 게 아니라 다른 모습으로 변형되어 계속 작동하고 있는가.

3부 예고

"신을 치워도 구조는 남는다" — 뒤르켐, 슈미트, 호퍼, 보겔린, 지라르. 세속 정치가 종교의 형식을 유지하며 작동하는 방식을 이론적으로 해부한다. 정당성, 이단, 희생양, 종말론 — 신이 없어도 이 구조들은 계속 돌아간다.

다음 편

3부 — 신을 치워도 구조는 남는다

정당성 생산, 이단 심판, 희생양 지목, 내재화된 종말론 — 세속 이데올로기가 종교의 형식을 그대로 계승하는 방식에 대한 이론적 해부. 에릭 호퍼가 말한 "내용이 달라도 같은 심리"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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