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없는 신학 — 3부: 신을 치워도 구조는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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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Three

신 없는 신학 — 정치는 종교를 떠난 적이 없다

신을 치워도
구조는 남는다

정당성, 이단, 희생양 — 세속 정치의 신학적 골격

정치신학 사회심리학 이데올로기 비판
근대 국가론의 모든 중요한 개념들은 세속화된 신학적 개념들이다. — 카를 슈미트, 『정치신학』(1922)

신을 제거하면 종교가 사라지는가. 1부와 2부에서 우리는 "종교"와 "정치"의 분리가 어떻게 발명되었는지를 추적했다. 그러나 그 발명이 실제로 무엇을 바꾸었는지는 아직 물어보지 않았다. 개념의 분리가 선언되었을 때, 종교가 수천 년간 수행해온 기능들 — 정당성 생산, 공동체 결속, 내부 규율, 적(敵)의 설정 — 은 어디로 갔는가.

대답은 냉혹하다. 그것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신학적 언어가 세속적 언어로 교체되었을 뿐, 작동 구조는 그대로 계승되었다. 이 사실을 가장 날카롭게 들여다본 다섯 명의 사상가가 있다. 뒤르켐, 슈미트, 호퍼, 보겔린, 지라르 — 이들의 논증은 각기 다른 출발점에서 하나의 수렴점으로 모여든다. 신 없는 신학은 가능하며, 실제로 우리 주변에서 작동하고 있다.

I

뒤르켐 — 신이 종교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

에밀 뒤르켐(Émile Durkheim)은 1912년 『종교생활의 원초적 형태』에서 종교 연구의 출발점 자체를 뒤집는 명제를 제시했다. 종교의 본질은 신에 대한 믿음이 아니다. 종교의 본질은 성(聖)과 속(俗)의 구분이며, 이 구분을 만들어내는 것은 초자연적 존재가 아니라 집단적 열광(collective effervescence)이다.

뒤르켐이 분석한 것은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의 토템 의례였다. 그들이 특정 동물이나 사물을 성스럽게 여기는 이유는 그것에 어떤 내재적인 신성함이 있어서가 아니다. 공동체가 함께 모여 그 대상에 집중적인 감정과 에너지를 쏟아부을 때, 그 집합적 경험 자체가 대상을 성스럽게 만든다. 신은 사실상 공동체가 자기 자신을 숭배하는 방식이다.

Durkheim
에밀 뒤르켐 · 종교생활의 원초적 형태 · 1912
집단이 신을 만든다 — 그 역이 아니라

뒤르켐의 논리에서 종교의 기능은 결국 사회적인 것이다. 공동체를 응집시키고, 공유된 가치를 신성화하며, 개인을 집단의 목적에 결속시킨다. 이 기능이 신이라는 형식으로 수행되는가, 아니면 국기·헌법·혁명적 이념이라는 형식으로 수행되는가는 본질적 차이가 아니다. 형식만 달라진 동일한 사회적 메커니즘이다.

이 논리의 귀결은 강력하다. 스타디움에서 함께 응원하는 군중, 혁명 광장에서 주먹을 쥐는 대중, 국기에 경례하는 시민 — 이것들은 종교의 유사물이 아니다. 뒤르켐에게 이것들은 종교와 동일한 기제가 다른 대상으로 향한 것이다. 신이 없어도 성/속의 구분은 작동하고, 성스러운 대상에 대한 모독은 분노를 일으키며, 의례적 결속은 공동체를 강화한다.

핵심 명제

종교의 본질은 신이 아니라 성/속의 구분과 집단적 열광이다. 이 구분이 작동하는 곳이라면, 신의 이름이 없어도 그것은 종교적 현상이다.

II

슈미트 — 주권자는 신학적 개념의 후예다

카를 슈미트(Carl Schmitt)는 1922년 『정치신학』의 첫 문장에서 선언했다: "주권자는 예외 상태에 관해 결정하는 자다." 그리고 곧이어 이 명제의 함의를 밝혔다. 근대 국가론의 핵심 개념들 — 주권, 비상사태, 결단, 정당성 — 은 신학적 개념들의 직접적인 세속화된 버전이라고.

슈미트의 계보학을 따라가면 대응 관계가 선명해진다. 전능한 신이 기적을 통해 자연법칙에 개입하듯, 주권자는 비상사태를 선포하여 법 질서에 개입한다. 신이 창조를 통해 무(無)에서 질서를 부여했듯, 헌법 제정 권력은 무에서 법적 질서를 창설한다. 신학에서 이단 심판이 공동체의 경계를 규정했듯, 정치에서 적(敵)의 규정이 정치 공동체의 경계를 규정한다.

기능 신학적 형식 세속적 형식
정당성의 원천 신의 의지 · 천명(天命) 인민주권 · 헌법 · 역사의 법칙
법 너머의 결단 신의 기적 · 예외적 섭리 비상사태 · 혁명적 결단
절대적 텍스트 성경 · 쿠란 · 경전 헌법 · 당 강령 · 혁명 선언
해석 권위 성직자 · 율법학자 · 공의회 헌법재판소 · 당중앙 · 지식인 전위
공동체의 경계 신자 vs 불신자 · 이단자 아군 vs 적 · 반동 · 배신자
종말론적 목표 천국 · 최후 심판 · 구원 공산주의 완성 · 천년제국 · 위대한 사회

슈미트의 통찰은 정치철학에 불편한 물음을 남긴다. 우리가 민주주의나 인권을 옹호할 때, 우리는 합리적 논증에 기반하고 있는가, 아니면 신성화된 믿음을 방어하고 있는가. 이 물음이 불편한 이유는, 정직하게 들여다보면 종종 후자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자에 대한 도덕적 분노는 이단자에 대한 그것과 구조적으로 다르지 않다.

III

호퍼 — 내용이 달라도 광신자는 같은 심리다

부두 노동자 출신의 독학 철학자 에릭 호퍼(Eric Hoffer)는 1951년 『맹신자들(The True Believer)』에서 20세기의 가장 냉혹한 관찰 하나를 내놓았다. 기독교 광신자가 되는 것과, 공산주의자가 되는 것과, 나치가 되는 것 사이에는 심리적 장벽이 거의 없다. 내용이 달라도 그것들은 동일한 인간적 필요를 채운다.

Hoffer
에릭 호퍼 · 맹신자들 · 1951
광신자를 만드는 것은 이념이 아니라 심리다

호퍼가 분석한 "참된 신자(true believer)"의 심리는 네 가지로 압축된다. 첫째, 자기 혐오와 자아 소멸 욕구 — 운동에 녹아들어 "나"를 지우고 싶다. 둘째, 확실성에 대한 갈망 — 의심 없이 헌신할 수 있는 절대적 진리가 필요하다. 셋째, 선택받음의 감각 — 우리만이 진실을 안다는 구별의식. 넷째, 적의 필요성 — 증오할 공통의 대상이 없으면 운동이 응집되지 않는다. 이 구조는 어떤 이념 아래서도 동일하게 작동한다.

호퍼의 통찰이 불편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저 사람들은 광신자이고, 나는 이성적 판단에 따라 행동한다"는 자기 인식을 허물기 때문이다. 호퍼에 따르면 광신의 여부는 믿음의 내용이 아니라 믿음을 다루는 방식, 즉 의심을 허용하는가 아닌가에 달려 있다. 아무리 세련된 진보적 이념도, 아무리 과학적으로 포장된 이데올로기도, 이 심리 구조 위에서 작동하는 순간 신학적 광신과 기능적으로 동일해진다.

광신자를 바꾸는 것은 새로운 논증이 아니라
새로운 신앙이다. 내용이 바뀌어도 구조는 유지된다.
IV

보겔린 — 종말론을 현세로 끌어내리면 더 위험해진다

정치철학자 에릭 보겔린(Eric Voegelin)은 나치즘과 공산주의를 분석하면서 전체주의의 심층 구조에서 하나의 공통 패턴을 발견했다. 그는 이것을 "내세의 세속화(immanentizing the eschaton)"라고 불렀다. 종말론적 목표를 초월적 피안(彼岸)에서 현세의 역사 속으로 끌어내리는 것.

원래 기독교 종말론은 초월적이다. 천국은 역사 너머에 있고, 완전한 구원은 신의 섭리에 의해서만 실현된다. 인간이 역사 안에서 완전한 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는 주장은 이단이다. 이 구조는 어떤 의미에서 안전 장치를 내장하고 있다. 완전한 이상은 현세에서 강제로 실현할 수 없다는 신학적 겸허함이 과잉된 폭력을 제어하기 때문이다.

Voegelin
에릭 보겔린 · 새로운 정치학 · 1952
지상낙원을 믿는 자가 더 많이 죽인다

근대 이데올로기 운동들은 이 안전 장치를 제거한다. 공산주의는 "역사의 법칙에 따라 계급 없는 사회가 이 세계에서 반드시 도래한다"고 선언하고, 나치즘은 "인종적 정화를 통해 지금 여기서 천년제국이 실현된다"고 선언한다. 구원이 현세에서 가능하다는 믿음은, 그 구원을 방해하는 자들을 지금 당장 제거하는 것을 정당화한다. 초월을 제거하면 오히려 더 폭력적인 광신이 된다.

보겔린의 진단은 20세기의 참사들을 이해하는 데 핵심적이다. 종교적 원리주의보다 세속적 전체주의가 단기적으로 훨씬 많은 사람을 죽인 이유 — 스탈린의 대숙청, 마오의 문화혁명, 폴 포트의 킬링필드 — 는 바로 이 초월의 부재에 있다. 신의 이름으로 죽이는 자는 신의 심판을 두려워할 수 있다. 역사의 법칙 이름으로 죽이는 자는 두려워할 심판자가 없다.

V

지라르 — 희생양 없이는 공동체가 없다

르네 지라르(René Girard)는 문학비평에서 출발하여 인류학과 신학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하나의 거대한 이론을 구축했다. 그 핵심은 희생양 메커니즘이다. 공동체 내부에 긴장과 갈등이 축적될 때, 가장 원시적이고 효율적인 해소 방식이 있다. 한 명 혹은 한 집단을 공통의 적으로 지목하여, 그것을 제거함으로써 공동체를 정화하고 결속시키는 것.

Girard
르네 지라르 · 폭력과 성스러움 · 1972
희생 제의와 정치적 숙청은 같은 구조다

지라르에게 원시 종교의 희생 제의와 근대 정치의 적 창출은 구조적으로 동일하다. 둘 다 집단 내부의 모방적 경쟁과 폭력을 특정 대상에게 전이(轉移)시킴으로써, 공동체를 일시적으로 통합한다. 희생양은 반드시 실제 죄가 있어야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죄가 명백하지 않을수록 — 즉 무고(無辜)할수록 — 희생의 의례적 효과는 더 강력하다. 억울함이 있어야 극적 정화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지라르의 틀로 보면 현대 정치의 많은 현상들이 새롭게 읽힌다. 선동적 운동이 반드시 악마화할 적을 필요로 하는 것, 적의 존재가 오히려 운동의 정당성을 역으로 증명하는 논리("저들이 우리를 공격한다는 것은 우리가 옳다는 증거"), 희생양이 제거된 이후에도 새로운 희생양이 곧 나타나는 반복성 — 이 모든 것이 희생양 메커니즘의 작동이다.

VI

다섯 논증의 수렴 — 그래서 무엇이 달라지는가

뒤르켐, 슈미트, 호퍼, 보겔린, 지라르는 서로 다른 시대, 다른 출발점, 다른 방법론에서 출발했지만 하나의 공통된 지점으로 수렴한다. 종교의 기능적 구조는 신을 제거한 이후에도 지속된다. 신학적 언어가 세속적 언어로 바뀌었을 뿐, 성스러운 대상의 설정, 이단의 지목, 희생양의 창출, 종말론적 목표를 향한 돌진은 계속된다.

그렇다면 이것이 단지 이론적 관찰로 그쳐야 하는가. 이 인식이 실천적으로 의미를 가지려면, 위험한 방향과 덜 위험한 방향을 가르는 기준이 있어야 한다. 모든 정치 운동이 종교적 구조를 가진다면, 그 구조가 전체주의로 귀결되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를 가르는 것은 무엇인가.

↙ 덜 위험한 방향 더 위험한 방향 ↘
신성화된 대상을 반증 가능하게 유지한다 — 비판과 수정을 허용한다
신성화된 대상을 절대화한다 — 의심 자체를 이단으로 처리한다
내부 비판자를 비판자로 처우한다 — 논증으로 응답한다
내부 비판자를 이단자로 처우한다 — 도덕적 오염으로 처리한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직시한다 — 초월적 겸허함을 유지한다
이상을 지금 당장 실현할 수 있다고 믿는다 — 장애물 제거를 정당화한다
목표를 위해 수단의 제한을 인정한다
목표의 신성함이 수단을 정화한다고 믿는다
적을 협상 가능한 타자로 설정한다
적을 제거해야 할 악으로 설정한다 — 희생양 메커니즘이 가동된다

이 기준들은 추상적으로 보이지만, 구체적인 현상에 적용하면 놀랍도록 예리하게 작동한다. 어떤 정치 운동이 내부 비판을 논증으로 받아내지 않고 배신과 오염의 언어로 처리할 때, 그 순간 그것은 종교적 불관용의 구조로 진입한다. 어떤 이념이 현실의 실패를 이념의 문제로 보지 않고 "불순분자의 방해"로 설명할 때, 희생양 메커니즘이 가동되고 있다.


1부에서 우리는 종교가 처음부터 정치였음을 보았다. 2부에서는 정교분리가 발명이었음을 확인했다. 3부에서 드러난 것은 그 발명 이후에도 종교의 구조적 골격이 세속 정치 속에 그대로 살아있다는 사실이다.

이제 이것이 추상적 이론이 아니라 우리 눈앞의 현실임을 보여줄 차례다. 신성화된 계보, 이단 지목, 사제 계급의 충돌, 내재화된 완성 서사 — 이 모든 구조가 오늘의 한국 정치에서 어떻게 압축적으로 재현되었는지를 하나의 사건을 통해 해부한다.

4부 예고

"한국 진보 정치의 신학 해부" — 유시민 ABC론이 하루 만에 200만 조회를 기록하고, 총리까지 나서서 진화에 나서야 했던 이유. 이론이 현실을 만나는 지점.

다음 편

4부 — 한국 진보 정치의 신학 해부

유시민 ABC론의 구조 분석 — 성스러운 계보 설정, 이단 지목, 사제 계급의 충돌, "분석 도구"라는 프레이밍이 오히려 반박 불가능성을 강화한 메커니즘. 3부의 다섯 이론이 하나의 사건 안에서 동시에 작동하는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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