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증상 - 유동성의 역설



레짐 아 브니르

Régime à Venir - 도래할 체제에 관한 고찰



Part I

증상: 유동성의 역설


돈은 넘치는데 왜 가난한가



❂   ❂   ❂


"M2 +24.9%인데 인플레 1.2%. 돈은 실물로 안 간다. 자산으로 간다. 이것이 모든 격차의 시작이다."



1.1

들어가며: 이상한 풍경


2020년, 전 세계 중앙은행들이 역사상 유례없는 규모의 돈을 풀었다. 미국 연준(Fed)은 M2 통화량을 1년 만에 24.9% 늘렸다. 1970-80년대 인플레이션기도,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양적완화기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2021년 2월에는 전년대비 증가율이 26.9%를 기록했다-1959년 통계 시작 이래 최고치였다.1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물가는 오르지 않았다. 2020년 미국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고작 1.2%. 돈이 25% 늘었는데 물가는 1%만 올랐다. 경제학 교과서가 예측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었다.


그렇다면 그 돈은 어디로 갔을까?




1.2

유동성 폭증 vs 물가 안정의 역설


미국: 시차를 두고 폭발한 인플레이션


돈과 물가의 관계를 시간순으로 추적해보자.



표 1. 미국 M2 증가율과 소비자물가 추이
연도 M2 증가율 소비자물가(CPI) 해석
2020 +24.9% 1.2% 거의 반영 안 됨
2021 +12.5% 4.7% 일부만 반영
2022 -1.3% 8.0% 지연 효과로 폭발

출처: Federal Reserve FRED, U.S. Bureau of Labor Statistics



2022년 6월, CPI는 9.1%로 40년 만에 최고치를 찍었다.2 그런데 이때 M2 증가율은 이미 마이너스로 돌아선 후였다. 연준이 2021년 11월 테이퍼링을 발표하고, 2022년 3월 금리인상을 시작한 뒤였다.


여기서 두 가지 사실이 드러난다.


첫째, 유동성과 물가 사이에는 시차가 있다. M2 정점(2021년 2월)과 CPI 정점(2022년 6월) 사이에는 약 18개월의 시차가 존재했다. 돈을 풀어도 바로 물가가 오르지 않고, 돈을 거둬들여도 바로 물가가 내리지 않는다.


둘째, 유동성 증가량에 비하면 물가 반응은 훨씬 약하다. M2가 25% 늘었을 때 CPI는 1.2%만 올랐다. 물가가 결국 8%까지 오르긴 했지만, 단순 비례로 치면 턱없이 부족하다. 나머지 유동성은 어디로 갔을까?



한국: 사상 최대 통화량, 안정된 물가


한국도 비슷한 패턴을 보인다.


2025년 11월 기준 한국의 M2(광의통화)는 4,496조 원으로 사상 최고치다. 전년대비 증가율은 8.5%에 달한다.3 그런데 같은 시기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2.3%-한국은행 목표치(2%) 근처에서 안정적이다.4


더 흥미로운 것은 환율이다. 원달러 환율이 1,400원대를 오가는 고환율 상황인데도, 수출 기업들이 체감하는 혜택은 미미하다. 내수는 침체되어 있고, 돈은 어딘가로 흘러가고 있다.


그 어딘가가 어디인지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직감하고 있다.




1.3

돈맥경화: 돈은 많은데 돌지 않는다


통화유통속도의 추락


경제학에서 '통화유통속도(Velocity of Money)'는 화폐 1단위가 일정 기간 동안 재화와 서비스 구매에 몇 번 사용되는지를 측정한다. 쉽게 말해, 돈이 얼마나 활발하게 돌아다니는지를 보여주는 지표다.



표 2. 미국 M2 통화유통속도(M2V) 추이
시점 M2V (비율) 비고
1997년 7월 2.19 역대 최고
2019년 4월 1.46 팬데믹 직전
2020년 4월 1.10 역대 최저
2025년 7월 1.41 현재

출처: Federal Reserve FRED



2020년 4월, 미국의 M2 통화유통속도는 1.10으로 역대 최저를 기록했다.5 1997년 최고치(2.19)의 절반 수준이다. 돈은 역대급으로 풀렸는데, 그 돈이 돌지 않고 있다는 뜻이다.


왜 그럴까? 몇 가지 설명이 있다.


예비적 화폐 보유: 불확실성이 높으면 사람들은 돈을 쓰지 않고 쥐고 있는다.

초저금리: 금리가 0%에 가까우면 돈을 은행에 넣어둘 이유가 없지만, 그렇다고 실물에 투자할 유인도 약하다.

소득 감소: 돈이 많아도 실질 소득이 줄면 소비 여력이 없다.


하지만 이 설명들은 한 가지 핵심을 놓치고 있다. 돈이 '사라진' 것이 아니다. 다른 곳으로 갔을 뿐이다.



돈은 실물이 아닌 자산으로 흘러갔다


2020-2022년, 미국 주택 가격은 평균 10만 달러 이상 올랐다.6 팬데믹 이전(2012-2020)에는 연간 약 1만 2천 달러씩 오르던 것이 갑자기 폭등한 것이다. 주식시장도 마찬가지였다. S&P500은 2020년 3월 저점에서 2021년 말까지 두 배 가까이 뛰었다.


소비자물가는 1%밖에 안 올랐는데, 자산 가격은 수십 퍼센트 올랐다. 돈은 빵이나 우유를 사는 데 쓰이지 않았다. 주식과 부동산을 사는 데 쓰였다.


이것이 자산 인플레이션이다. 공식 물가지수에는 잡히지 않지만, 자산을 가진 사람과 갖지 못한 사람 사이의 격차를 벌리는 보이지 않는 인플레이션이다.




1.4

칸티용 효과: 누가 먼저 돈을 받는가


18세기 경제학자의 통찰


리처드 칸티용(Richard Cantillon)은 1755년 출간된 저서에서 흥미로운 관찰을 남겼다.7 화폐 공급이 늘어날 때, 그 효과는 경제 전체에 균등하게 퍼지지 않는다. 누가 먼저 새 돈을 받느냐에 따라 승자와 패자가 갈린다.


현대에 적용하면 이렇다:


1. 중앙은행이 양적완화로 돈을 푼다.
2. 이 돈은 먼저 금융기관에 들어간다.
3. 금융기관은 가격이 오르기 전에 자산을 매입한다.
4. 자산 가격이 오른다.
5. 한참 뒤에야 이 돈이 일반 시민에게 도달한다.
6. 그때는 이미 가격이 올라 있다.


최초 수혜자는 싼 가격에 자산을 산다. 나중 수혜자는 비싼 가격에 자산을 사거나, 아예 살 수 없게 된다. 돈을 푸는 행위 자체가 부의 재분배를 일으키는 것이다-위로.



실증적 증거


네덜란드 중앙은행(De Nederlandsche Bank) 소속 연구자들이 12개 선진국의 1920-2015년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는 명확하다:8


"우리의 증거는 통화정책이 소득 불평등에 유의미한 영향을 미침을 시사한다."


SSRN에 발표된 연구(2023)는 더 직접적으로 말한다:9


"중앙은행 개입으로 인한 사회적 해악은 2007-8 금융위기 이후 전례 없는 수준이며, 코로나 시대에는 더욱 심화되었다."


2020년 미국의 경기부양책을 비교해보자. 연준의 자산매입 규모는 4.5조 달러였다. 일반 시민에게 직접 지급된 경기부양 수표는 4천억 달러-11배 이상 차이가 난다.10 전자는 금융시스템 상단에서 시작해서 아래로 흘러내린다(trickle down). 후자는 아래에서 시작해서 위로 올라간다. 어느 쪽이 더 많았는지는 결과가 말해준다.



자산 격차의 확대


2022년 연준의 소비자금융조사(SCF)에 따르면:11


• 전체 가구 중위 자산: $193,000 (2019년 대비 +37%)
• 상위 10% 가구 중위 자산: $3,800,000


20배 차이다. 그리고 이 격차는 벌어지고 있다. 중위 소득은 3% 증가하는 데 그쳤지만, 평균 소득(상위 계층이 끌어올림)은 15% 뛰었다.


투자 참여율 격차도 크다. 2019-2024년 기간 중 중간 소득층(40-60%)의 투자 참여율은 35% 미만이었지만, 상위 5%는 약 70%에 달했다.12 자산 인플레이션 시대에 자산이 없으면 뒤처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자산이 없는 사람은 대체로 자산을 살 여력도 없다.




1.5

화폐가치 하락과 신뢰 위기


달러의 구매력은 얼마나 떨어졌나


1971년 닉슨 대통령은 달러와 금의 태환을 중단했다(닉슨 쇼크). 그 전까지 달러는 금으로 교환할 수 있었기에 발행량에 제한이 있었다. 그 제한이 사라졌다.


그로부터 55년이 지난 지금:


• 1971년의 1달러 = 2026년의 8달러
• 누적 물가 상승률: 700%
• 연평균 인플레이션: 3.85%
1달러의 실질 구매력은 1971년의 12.5%13


더 긴 시계열로 보면 더 극적이다. 1913년(연준 설립) 기준으로 달러의 구매력은 현재 몇 센트 수준에 불과하다.14


화폐가치가 지속적으로 하락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저축의 가치가 녹는다: 현금을 쥐고 있으면 매년 구매력이 줄어든다.
임금의 실질가치가 정체된다: 명목 임금이 올라도 물가가 더 오르면 무의미하다.
채무자가 유리하다: 정부와 기업(빚을 지는 쪽)은 인플레이션을 환영한다. 빚의 실질 부담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자산 보유가 강제된다: 현금의 가치가 떨어지므로, 부를 지키려면 자산을 사야 한다.



신뢰 위기의 시작


돈의 본질은 신뢰다. 이 종이조각(또는 숫자)이 내일도 가치를 유지할 것이라는 믿음이 화폐를 화폐로 만든다.


그런데 중앙은행이 무제한으로 돈을 찍어내면, 이 신뢰는 흔들린다. 2020년 이후 가상화폐 열풍의 배경에는 이 불신이 있다. 비트코인이든 이더리움이든, 그 매력의 핵심은 "중앙은행이 마음대로 늘릴 수 없다"는 점이다-적어도 지지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물론 가상화폐가 해답인지는 별개의 문제다(이는 3부에서 다룬다). 중요한 것은, 법정화폐에 대한 불신이 이미 시작되었다는 사실이다.


"돈은 많아지는데 신뢰는 사라진다. 이것이 모든 말단 투쟁의 시작점이다."



1.6

글로벌 동조화: 어디서나 같은 풍경


이 현상은 미국이나 한국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일본: 30년간의 양적완화, 초저금리, 그리고 "잃어버린 30년"
유럽: ECB의 마이너스 금리 실험과 자산 매입 프로그램
중국: 부동산 버블과 그림자 금융


어디서나 비슷한 처방이 반복된다: 경기가 나빠지면 금리를 내리고 돈을 푼다. 자산 가격이 오르고 격차가 벌어진다. 다음 위기가 오면 더 많은 돈을 푼다. 자산 가격이 더 오르고 격차가 더 벌어진다.


"유동성 과잉으로 생긴 문제를 유동성 공급으로 푸는 폰지 구조"


이것이 현재 글로벌 경제의 작동 방식이다. 선진국들은 양적완화에 중독되어 있다. 끊으면 금단 증상(자산 가격 폭락, 경기 침체)이 오기 때문에 끊을 수 없다. 그래서 계속 투여한다. 투여할수록 내성이 생겨 더 많은 양이 필요해진다.


이 구조가 지속 가능한가? 그것은 이 시리즈의 후반부에서 다룰 문제다.




1.7

마치며: 의문의 구조


이 글을 시작하며 던진 질문으로 돌아가자.


"돈은 많이 풀렸는데 왜 내 삶은 나아지지 않을까?"


이제 그 구조가 조금은 보일 것이다.



1부 요약


1. 돈은 풀렸다. 역대급으로.


2. 그 돈은 실물 경제로 흘러가지 않았다. 통화유통속도 하락이 이를 보여준다.


3. 그 돈은 자산 시장으로 흘러갔다. 주택과 주식 가격 폭등이 이를 보여준다.


4. 자산을 가진 사람과 갖지 못한 사람의 격차가 벌어졌다. 칸티용 효과다.


5. 화폐 자체에 대한 신뢰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가상화폐 열풍이 이를 보여준다.



당신이 자산을 갖고 있다면, 지난 몇 년은 나쁘지 않았을 것이다. 당신이 자산이 없다면-특히 청년이라면-"열심히 일하면 집을 살 수 있다"는 말이 점점 공허하게 들릴 것이다.


이것이 1부에서 제시하는 증상이다. 유동성의 역설. 돈은 넘치는데 가난한 이유.


다음 2부에서는 이 증상의 더 깊은 구조-생산과 노동의 관계가 어떻게 변했는지-를 살펴본다.








Notes


1. Federal Reserve FRED, M2 Money Stock; St. Louis Fed, "The Rise and Fall of M2" (2023)


2. U.S. Bureau of Labor Statistics, Consumer Price Index; St. Louis Fed, "M2 Growth and Inflation in Recent Years" (2023)


3. 한국은행 경제통계시스템 ECOS; Trading Economics - 한국 M2


4. 통계청 소비자물가지수; e-나라지표


5. Federal Reserve FRED, Velocity of M2 Money Stock


6. Brookings Institution, "Quantitative easing and housing inflation post-COVID"


7. Richard Cantillon, Essai sur la Nature du Commerce en Général (1755)


8. Mehdi El Herradi & Aurélien Leroy, De Nederlandsche Bank 연구


9. Cameron M. Weber, "Using the Classical Equation of Exchange and Cantillon Effects...", SSRN (2023)


10. George Gammon, "The Cantillon Effect"


11. Federal Reserve, Survey of Consumer Finances (2022)


12. JP Morgan Chase Institute, "The affordability gap"


13. In2013Dollars Inflation Calculator; Visual Capitalist


14. Federal Reserve FRED, Purchasing Power of the Consumer Dollar; Minneapolis Fed Inflation Calcul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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