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것

얼마 전 EBS 채널에서 아이들의 문해력 저하를 다룬 영상을 보았다. 초등학생부터 고등학생까지, 학령인구 대다수가 자신들 학년에 맞는 교과서 내용을 이해하기 힘들어하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충격적이었던 건 아이들의 반응이었다.

 

"교과서가 잘못됐어요."

"만든 사람들이 우리를 괴롭히려고 이런 걸 만든 것 같아요."

"교육청이나 교과서를 만드는 회사에 고등학생의 문해력을 과대평가 하는 것 같아요."

이 장면을 본 아내는 "아이들이 점점 바보가 되고 있다"며 크게 안타까워했다. 하지만 나는 문득 다른 생각이 들었다.

 

저 아이들의 주장에도 일리가 있을지 모른다고.

 

우리는 모두 30만 년간 진화하지 않은 같은 종이다. 뇌 용량이 줄어들지도 않았고, 다른 생물학적 형질이 달라지지도 않았다.

 

오히려 이 아이들은 우리보다 훨씬 많은 정보에 노출되어 자랐다.

그렇다면 그 환경에 맞는 기호나 의미값이 따로 존재할 수도 있지 않을까?

 

아내는 내가 굉장히 이상한 생각을 한다고 핀잔을 주었다.


패러다임의 충돌

이 작은 가정 내 논쟁은 사실 우리 사회 전체가 겪고 있는 거대한 인식의 충돌을 축소판으로 보여준다. 한쪽에서는 "젊은 세대의 문해력 저하"를 우려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새로운 환경에 맞는 적응"이라고 해석한다.

 

그런데 여기서 간과하고 있는 중요한 지점이 있다. 우리는 지금까지 기성세대의 기준으로만 젊은 세대를 판단해왔다는 것이다.

 

전통적 문해력, 깊이 있는 사고, 선형적 서사 구조, 체계적 논증... 이 모든 것들은 분명 가치 있는 능력들이다.

 

하지만 이것들이 유일한 지적 능력의 척도일까?

더 나아가, 급변하는 디지털 환경에서도 여전히 최적의 척도일까?


정체되지 않은 현실

젊은 세대를 "퇴화"라고 단정하기에는, 그들 주변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이 너무나 역동적이다.

 

틱톡에서 하나의 밈이 시작되어 전 세계로 퍼져나가는 데 걸리는 시간은 몇 시간에 불과하다. 그 과정에서 원본은 수백 가지로 변주되고, 각기 다른 문화적 맥락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획득한다. 이런 일이 하루에도 수십 차례 일어난다.

 

젊은 세대는 이 모든 변화를 실시간으로 감지하고, 해석하고, 참여한다. 그들이 만들어내는 콘텐츠의 양과 창의성, 그리고 그것이 만들어내는 문화적 파급력은 역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다.


정보 효율성의 새로운 기준

더 흥미로운 점은 젊은 세대의 정보 처리 방식이다. 고해상도, 고대역폭, 높은 샘플링 레이트의 정보에 익숙한 그들에게

 

텍스트는 정보량 대비 입력 시간이 너무 큰 낭비적 매체가 되었다.

 

30초 틱톡 영상 하나에는 시각 정보, 청각 정보, 텍스트, 음향 효과, 편집 리듬이 다층적으로 압축되어 있다. 같은 내용을 텍스트로 읽으려면 2-3분이 걸리지만, 정보 밀도는 훨씬 낮다.

 

특히 '짤' 문화는 주목할 만하다. 드라마나 영화의 한 장면을 캡처한 단 한 장의 이미지가, 원래 맥락과 완전히 다른 상황에서 사용되면서 새로운 의미를 획득한다. 원본 작품을 모르는 사람들도 그 짤이 전달하는 감정이나 뉘앙스를 즉시 이해한다. 이는 하나의 장면만으로 맥락과 호응을 끌어낼 수 있는 압축적인 새로운 형태의 문법이다.


창조의 본질과 새로운 형태

흥미롭게도, 이런 현상은 창조에 대한 오래된 진리를 다시 확인해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일찍이 미메시스(모방) 이론을 통해 모든 예술이 기존 것의 모방에서 시작된다고 했고,

피카소는 "좋은 예술가는 베끼고, 위대한 예술가는 훔친다"고 말했다.

 

젊은 세대의 리믹스, 패러디, 밈 문화는 바로 이런 창조의 본질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기성세대는 이런 새로운 문화 현상들을 '깊이가 얕다'고 평가하곤 한다. 하지만 반응 속도와 콘텐츠 생산량 자체는 그 어떤 과거 시대에도 비할 수 없이 폭발적이다. 하루에 유튜브에 업로드되는 영상만 50만 시간이 넘고, 틱톡에서는 매분 2,700개의 영상이 새로 올라온다. 이 모든 것이 개인들의 창작 활동이다.


해석 도구의 한계

문제는 우리가 이런 현상을 분석할 적절한 도구를 갖고 있지 못하다는 데 있다. 기존의 인문학적, 사회과학적 분석틀은 대부분 매스미디어 시대의 선형적, 계층적 정보 흐름을 전제로 설계되었다.

 

EBS 영상에서 실제로 놀라웠던 점은 따로 있었다. "문해력이 떨어진다"고 진단받은 그 아이들이 구사하는 언어 표현력이었다. 예전 어린 학생들의 TV 인터뷰 장면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교과서가 잘못됐다", "편찬자들이 우리 수준을 파악하지 못했다"는 주장을 막힘없이 표현하는 모습은, 문해력이 떨어지는 아이들의 언어라고 믿기에는 너무 의아할 정도였다.

 

저 아이들의 언어에는 우리 세대가 아이였을 때와는 다른 패턴이 분명히 있었다. 더 직관적이고, 더 단도직입적이며, 동시에 자신들의 입장을 논리적으로 방어하는 능력도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젊은 세대가 만들어내는 것은 네트워크적이고 비선형적이며, 끊임없이 변화하는 생태계다. 기존 도구로 이를 재단하는 건 마치 현미경으로 은하계를 관측하려는 것과 같다.


변화의 진짜 동력

더욱이 우리는 변화의 한복판에 서 있다. 디지털 시대를 지나 AI 시대로 넘어가는 이 순간, 모든 것이 급격하게 재편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과거의 기준점에만 매달리는 것은 현실 인식을 오히려 방해할 수 있다.

 

젊은 세대의 비선형적 사고와 행태는 이미 오래 전부터 사회 구조 변화와 함께 진행되고 있던 현상이 세대에 투사된 것처럼 보인다. 즉, 이들은 변화의 원인이 아니라 이미 변화하고 있던 사회의 가장 민감한 센서이자 최적화된 결과물일 수 있다.


새로운 관찰의 필요성

이제는 다른 접근이 필요하다. 젊은 세대의 변화를 기존 기준으로 평가하는 대신, 그 변화 자체를 있는 그대로 관찰해보는 것이다.

 

그들이 정보를 처리하는 방식, 의미를 생성하는 과정, 공감대를 형성하는 메커니즘... 이 모든 것들을 선입견 없이 들여다보면, 우리가 놓치고 있던 새로운 차원의 지적 활동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다음 글에서는 젊은 세대가 만들어내고 있는 구체적인 현상들 - 밈 문화의 압축적 의미 생성, 숏폼 콘텐츠의 정보 효율성, 알고리즘 기반 개인화된 정보 소비, 그리고 쏠림 현상이 만들어내는 창조의 양극화 - 을 자세히 살펴볼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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