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글에서 검색 몇 번 하고 의사와 논쟁하는 사람들이 있다.

유튜브 영상 몇 개 보고 경제학자를 무시하는 사람들이 있다.

페이스북 포스트 몇 개 읽고 기후학자를 비웃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정작 의사들은 서로 다른 진단을 내린다.

경제학자들은 매번 예측을 빗나간다.

기후학자들조차 구체적 시나리오에선 의견이 갈린다.

 

누가 전문가인가? 구글 검색으로 무장한 당신인가? 아니면 매번 틀리는 그들인가?

 

2008년 금융위기를 예측한 경제학자는 몇 명이었나?

코로나19 팬데믹을 미리 경고한 의학자는 몇 명이었나?

기후변화의 구체적 시점을 정확히 맞춘 과학자는 몇 명이었나?

 

21세기는 모든 사람이 전문가라고 착각하는 시대다.

동시에 진짜 전문가는 사라진 시대다.

정보는 넘쳐나지만 지혜는 사라졌다.

모든 사람이 확신하지만 아무도 확실하지 않다.


이것이 정보화 시대의 민주화인가?

아니면 집단적 망상인가?


전문성도 상호 주관적 실재다

하라리가 밝힌 진실을 기억하자. 인간 사회의 모든 권위는 상호 주관적 실재다. 많은 사람이 믿기 때문에 존재한다.

 

전문성도 마찬가지다.

 

의사가 의사인 이유는 의학 지식이 있어서가 아니다. 사람들이 그를 의사라고 믿기 때문이다.

경제학자가 경제학자인 이유는 경제를 예측할 수 있어서가 아니다. 사람들이 그의 학위와 소속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기후학자가 기후학자인 이유는 기후를 정확히 아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그의 연구와 논문을 믿기 때문이다.

 

전문성은 지식이 아니라 신뢰다. 그런데 그 신뢰가 무너지고 있다.

 

1. 톰 니콜스의 예언이 현실이 되다

전문성의 죽음: 2017년의 경고

톰 니콜스 미국 해군대학 교수는 2017년 『전문지식의 죽음(The Death of Expertise)』에서 이미 경고했다. 인터넷이 급속하게 퍼지면서 정보가 골고루 분산되고, 누구나 전문가로 자처하는 상황이 될 것이라고.

 

전통적 전문성의 구조:

  • 위계적 지식 체계: 스승 → 제자, 선배 → 후배
  • 기관의 보증: 대학 학위, 전문 자격증, 소속 기관
  • 검증된 절차: 동료 평가, 학술지 게재, 오랜 경험
  • 사회적 인정: 권위에 대한 존중, 겸손한 학습 태도

디지털 시대의 충격

2000년대 초, 인터넷이 등장했을 때 사람들은 꿈꿨다: "이제 모든 사람이 지식에 접근할 수 있다!" "정보의 민주화가 이루어진다!" "전문가 독점이 무너진다!"

 

그런데 실제로 일어난 일은:

  • 정보 접근 = 지식 습득이라는 착각
  • 검색 능력 = 전문성이라는 착각
  • 의견 = 사실이라는 착각
  • 확신 = 정확성이라는 착각

구글 효과: 검색이 학습을 대체하다

구글 이전:

  • 모르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당연했다
  • "잘 모르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정직했다
  • 전문가에게 묻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구글 이후:

  • 모르는 것을 3초 내에 검색한다
  • "잘 모르겠다"고 말하는 사람은 바보 취급받는다
  • 전문가와 논쟁하는 것이 당연해졌다

니콜스는 "평범한 미국인의 수준이 '아는 게 별로 없는' 상태를 넘어 '잘못 알고' 있기까지 한 데다 '잘못된 지식을 대놓고 우기는' 지경까지 내려왔다"고 개탄했다.

하지만 정보 ≠ 지식 ≠ 지혜다.

 

2. 확증편향의 알고리즘화

개인맞춤형 진실의 시대

과거에는 모든 사람이 같은 신문을 읽었다. 같은 뉴스를 봤다. 같은 교과서로 공부했다. 지금은 각자 다른 정보를 소비한다:

  • 유튜브: 당신이 보고 싶어할 영상만 추천
  • 페이스북: 당신이 동의할 만한 의견만 노출
  • 구글: 당신의 검색 히스토리에 맞춘 결과만 제공
  • 인스타그램: 당신이 부러워할 삶만 보여줌

결과: 각자의 세계에서 각자가 전문가가 되는 착각

알고리즘이 만드는 가짜 전문성

유튜브를 30분 보면 당신은 그 분야의 전문가가 된 기분을 느낀다. 페이스북에서 기사 몇 개를 읽으면 당신은 그 주제의 권위자가 된 기분을 느낀다. 구글에서 검색 몇 번을 하면 당신은 의사, 경제학자, 정치학자가 된 기분을 느낀다.

 

이것은 착각이다. 하지만 매우 달콤한 착각이다.

 

3. 에코챔버의 과학화

캐스 선스타인의 예측이 현실이 되다

카스 선스타인은 이미 2000년대에 경고했다: 디지털 기술이 "내 의견이 다수"라는 착각을 만들어낼 것이라고. 그의 예측이 현실이 되었다.

각 에코챔버에서는:

  • 내 의견이 상식이다
  • 내 정보원이 가장 정확하다
  • 내 전문가가 가장 신뢰할 만하다
  • 반대 의견은 모두 가짜뉴스다

같은 데이터, 다른 결론

2025년 현재, 다음 주제들에 대해 "전문가들"이 정반대 결론을 내린다:

경제:

  • A 전문가: "인플레이션이 문제다"
  • B 전문가: "디플레이션이 더 위험하다"
  • C 전문가: "둘 다 틀렸다, 스태그플레이션이 온다"

의학:

  • A 의사: "비타민 D 보충제가 필수다"
  • B 의사: "비타민 D 보충제는 위험하다"
  • C 의사: "비타민 D는 음식으로만 섭취해야 한다"

기후:

  • A 학자: "2030년이 티핑포인트다"
  • B 학자: "2050년까지는 괜찮다"
  • C 학자: "이미 돌이킬 수 없다"

누가 맞는가? 아무도 모른다.

과학적 사실마저 정치적 입장이 되다

21세기의 가장 충격적인 현실: 과학이 정치가 되었다

  • 기후변화: 과학적 사실 → 정치적 입장
  • 백신: 의학적 치료 → 정치적 선택
  • 진화론: 생물학적 이론 → 종교적/정치적 신념
  • 마스크: 방역 수단 → 정치적 상징

과학도 결국 상호 주관적 실재였다. 사람들이 믿기 때문에 존재했던 것이다.

 

4. 플랫폼 자본주의와 관심 경제

클릭베이트의 구조화

왜 극단적 주장이 더 많은 관심을 받는가? 왜 중간 지대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가?

플랫폼의 수익 구조:

  • 더 많은 클릭 = 더 많은 광고 수익
  • 더 오래 머무르기 = 더 많은 데이터 수집
  • 더 자극적 콘텐츠 = 더 강한 중독성

결과:

  • 극단이 중간을 몰아낸다
  • 자극이 진실을 대체한다
  • 확신이 의심을 압도한다

140자의 전문가들

X(트위터)에서는 복잡한 문제를 140자로 해결한다. 인스타그램에서는 인포그래픽 하나로 모든 것을 설명한다. 틱톡에서는 15초 영상으로 세상의 진리를 전달한다.

복잡성을 견딜 수 없는 소통가짜 전문성을 양산한다.

 

5. 밈이 된 전문성

밈과 전문성의 구조적 동일성

전문가의 의견도 이제 밈처럼 작동한다:

  1. 바이럴 확산: 논리보다는 임팩트로 퍼진다
  2. 부족주의적 소비: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만 공유한다
  3. 검증 없는 존속: 틀려도 네트워크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4. 변형과 재생산: 무수히 많은 버전으로 복제된다

전문가 쇼핑의 시대

이제 사람들은 전문가를 쇼핑한다:

  • 내 의견에 맞는 전문가를 찾는다
  • 내 편견을 확인해주는 연구를 찾는다
  • 내 선택을 정당화해주는 데이터를 찾는다

전문가가 진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이 전문가를 만든다.

 

6. 가짜 전문성의 확산

인플루언서 전문가의 등장

  • 의학: 의대도 나오지 않은 '건강 인플루언서'가 수십만 팔로워
  • 경제: 경제학 전공도 아닌 '재테크 유튜버'가 수백만 구독자
  • 심리학: 심리학과 졸업도 아닌 '힐링 코치'가 수만 명 상담
  • 교육: 교육학 박사도 아닌 '공부 멘토'가 수억 수익

진짜 전문성과 가짜 전문성을 구분할 능력의 상실

문제: 일반인이 진짜 전문가와 가짜 전문가를 구분할 방법이 없다

기존 기준들의 무력화:

  • 학력? 학벌주의라고 비판받는다
  • 경력? 기득권이라고 공격받는다
  • 소속? 이해관계가 있다고 의심받는다
  • 논문? 일반인은 읽을 수 없다

새로운 기준들의 문제:

  • 조회수? 알고리즘이 조작할 수 있다
  • 팔로워? 봇으로 만들 수 있다
  • 댓글? 여론조작이 가능하다
  • 바이럴? 가짜뉴스도 바이럴된다

 

7. 전문성의 새로운 정의가 필요한 시대

전문성 2.0의 등장

전통적 전문성이 무너진 자리에 새로운 형태의 전문성이 등장하고 있다:

소통 전문성: 복잡한 내용을 쉽게 설명하는 능력

큐레이션 전문성: 정보의 바다에서 핵심만 골라내는 능력
맥락화 전문성: 개별 정보를 큰 그림 속에서 해석하는 능력

불확실성 전문성: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인정하는 능력

 

하지만 이런 새로운 전문성도 결국 상호 주관적 실재일 뿐이다.

 


마무리

당신이 확신하는 그 지식은 어디서 왔는가? 구글에서? 유튜브에서? 페이스북에서? 아니면 당신과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에게서?

 

전문가들도 틀린다. 하지만 당신은 더 틀렸다.

 

차이는 전문가는 틀렸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당신은 옳다고 확신한다는 것이다.

 

하라리가 맞았다. 전문성도 상호 주관적 실재다. 사람들이 믿기 때문에 존재한다. 하지만 지금은 수천 개의 서로 다른 전문성이 경쟁한다.

 

각자의 에코챔버에서 각자의 전문가가 각자의 진실을 말한다. 그리고 그 모든 진실들이 네트워크에 영원히 보존된다. 블록체인처럼, 밈처럼, 검증 없이.

 

가장 위험한 것은 무지가 아니다. 확신에 찬 무지다.

 

그런데 당신은 지금도 뭔가를 확신하고 있다. 의사를 믿든, 유튜버를 믿든, 구글을 믿든.

 

당신이 믿는 그 전문가도 결국 누군가가 만든 상호 주관적 실재다.


생각해 볼 문제 : 진정한 전문가란?

리처드 도킨스가 옥스퍼드 대학에서 공부하던 시절의 일이다.

 

매주 월요일 오후, 동물학과에서는 방문 연구자의 강연을 듣는 것이 관례였다. 어느 월요일, 미국의 세포생물학자가 찾아와 골지체(Golgi Apparatus)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완벽하고 설득력 있는 증거를 제시했다.

 

그 당시 한 노교수는 15년간 골지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어왔다. 그는 골지체를 현미경 관찰 과정에서 생기는 인공물(artifact)이라고 주장해왔던 것이다.

 

강연이 끝나자, 그 노교수는 강당 앞으로 성큼 걸어나가 미국 학자의 손을 잡고 열정적으로 말했다:

 

"친애하는 동료여, 감사하고 싶습니다. 지난 15년간 제가 틀렸다는 것을 알게 해주셔서 말입니다."

 

청중들은 손이 빨갛게 될 때까지 박수를 쳤다.

 

도킨스는 이렇게 회상한다: "그 일을 떠올리면 지금도 목이 메어옵니다."

 

이것이 진정한 전문가의 모습이다. 15년간 자신이 옳다고 믿었던 것이 틀렸다는 것을 알았을 때, 수치심이나 변명이 아닌 감사를 표현하는 사람.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자신의 주장이 반박당하면 논거로 응답하는 대신 팔로워들을 동원한다.

데이터로 틀렸음이 증명되면 상대방을 인격적으로 공격한다.

구독자들의 감정을 자극해 사이버불링을 조장한다.

틀렸다고 인정하는 것은 약함이고, 끝까지 우기는 것이 강함이라고 여긴다.

 

진정한 지적 용기는 집단을 동원하는 것이 아니다. 혼자서도 틀렸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진짜 전문성은 팔로워 수가 아니다.
진실 앞에서의 겸손함이다.

 

우리 시대에 이런 전문가가 몇 명이나 남아있을까?

당신은 틀렸다는 것을 알았을 때 감사할 수 있는가?

아니면 당신의 '에코챔버 군대'를 동원할 것인가?


다음 편에서는 당신이 '소통'이라고 믿는 그 모든 것들이 어떻게 거대한 환상에 불과한지 밝혀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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