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전 한 철학자의 소름 돋는 예언

- 위르겐 하버마스(Jürgen Habermas)가 본 미래, 그리고 우리의 현재


2024년 11월 6일, 세계가 다시 한번 놀란 아침

"트럼프 재집권 확정"
전 세계 언론이 일제히 보도한 이 뉴스를 본 사람들의 반응은 8년 전과 놀랍도록 비슷했다. "또?"
2016년만 해도 트럼프의 당선을 "돌발 사고"라고 여길 수 있었다. 하지만 2024년은 달랐다.
 
이번엔 그가 형사 기소를 받은 상태에서, 1월 6일 의사당 습격 사건의 책임자로 지목받은 상황에서 재집권에 성공한 것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모든 예측이 빗나간 이유

정치학자들은 당황했다. 경제학자들은 머리를 갸웃했다. 사회학자들은 새로운 이론을 찾아 헤맸다.
 
"경제가 좋아지면 현 정부가 유리하다" - 틀렸다
"극단적 후보는 중도층의 지지를 받기 어렵다" - 틀렸다
"스캔들이 많은 후보는 불리하다" - 틀렸다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제도가 극단을 견제한다" - 틀렸다
 
기존의 모든 정치 이론과 예측 모델이 연달아 실패했다. 마치 완전히 다른 게임의 룰북을 가지고 체스를 두려는 것 같았다.
하지만 한 사람만은 달랐다. 30년 전부터 정확히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경고해 온 사람이 있었다.


1990년대 초, 아무도 듣지 않았던 경고

1991년, 소련이 해체되고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역사의 종말"을 선언하던 그 시절. 세계는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승리에 취해 있었다. 세계화는 모든 문제의 해답처럼 여겨졌다.
그런데 독일의 한 철학자가 조용히, 하지만 단호하게 경고의 목소리를 높였다.
 
위르겐 하버마스(Jürgen Habermas)는 말했다.
 

"세계화가 민주주의를 파괴할 것이다."

 
당시만 해도 이런 주장은 시대착오적으로 들렸다. 세계화야말로 민주주의를 전 세계에 확산시키는 동력이 아니었던가? 경제적 상호의존은 평화를 가져오고, 자유무역은 모든 사람을 더 풍요롭게 만들 것이 아니었던가?
 
하지만 하버마스는 그 이면에 숨겨진 위험을 정확히 간파하고 있었다.


국경을 넘나드는 자본 vs 국경에 갇힌 민주주의

하버마스의 핵심 통찰은 간단하면서도 치명적이었다:
 
"경제는 세계화되는데 정치는 국가 단위에 머물러 있다"
 
자본은 국경을 자유롭게 넘나 든다. 다국적 기업들은 전 세계를 하나의 시장으로 여긴다. 금융은 24시간 실시간으로 지구 반대편까지 이동한다.
하지만 민주주의는? 여전히 국가라는 테두리 안에 갇혀 있다.
미국 시민들이 아무리 투표를 해도, 중국 공장에서 벌어지는 일이나 월스트리트 투자은행의 결정에는 영향을 미칠 수 없다. 하지만 그 결정들이 미국 중서부 공장 노동자의 일자리를 좌우한다.
 
"우리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결정들이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곳에서 내려지고 있다"


정치적 무력감의 탄생

이렇게 해서 민주적 정당성의 공백이 생겨났다.
시민들은 투표를 한다. 하지만 선출된 정치인들도 실제로는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다. 정말 중요한 결정들은 다국적 기업의 이사회에서, 국제금융기구에서, 글로벌 투자은행에서 내려진다.
 
"정치인들이 무능해서가 아니라, 애초에 권한이 없다"
 
이런 상황에서 시민들은 점점 더 정치에 대해 냉소적이 되었다. "누구를 뽑아도 마찬가지야", "어차피 중요한 건 우리가 결정하는 게 아니야"라는 체념이 퍼졌다.
 
하버마스는 이를 "민주주의의 후기 자본주의적 정당성 위기"라고 불렀다.


2016년, 예언이 현실이 되다

그리고 2016년이 왔다.
트럼프는 정확히 이 지점을 파고들었다.
 
"기존 정치는 다 가짜다"
"진짜 권력은 다른 곳에 있다"
"워싱턴 엘리트들은 여러분을 배신했다"
 
이것은 단순한 포퓰리즘이 아니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하버마스가 예언한 민주주의 위기의 징후였다.
사람들이 트럼프를 선택한 이유는 그가 뛰어나서가 아니라, 기존 시스템에 대한 절망 때문이었다.
 
"어차피 정상적인 정치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는 인식이 "그렇다면 아예 다 뒤집어버리자"는 충동으로 이어진 것이다.


트럼피즘이 보여준 민주주의의 역설

2024년 트럼프의 재집권은 이 위기가 더욱 심화되었음을 보여준다.
민주적 절차를 통해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후보가 당선되는 역설. 이것이야말로 하버마스가 가장 우려했던 시나리오였다.
트럼프의 지지자들은 모순적이게도 "민주주의를 구하기 위해"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후보를 선택했다. 그들에게 민주주의란 단순히 투표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의지가 실제로 반영되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세계화된 경제 구조에서 그런 의지 반영은 구조적으로 불가능했다.
 
그래서 그들은 "구조를 아예 바꿔버릴 강력한 리더"를 원했다.


"어차피 중요한 건 우리가 결정하는 게 아니야"

하버마스의 예언은 놀랍도록 정확했다. 하지만 그가 미처 예상하지 못한 것이 하나 있었다.
시민들의 반응이 체념에서 그치지 않고 분노로, 그리고 파괴적 충동으로 발전할 것이라는 점이었다.
 
"정상적인 정치가 무력하다면, 비정상적인 정치라도 시도해 보자"
"기존 엘리트들이 문제라면, 아예 엘리트가 아닌 사람을 뽑자"
"복잡한 세계화가 문제라면, 단순하게 국경을 다시 세우자"
 
이것이 트럼피즘의 본질이다. 세계화로 인한 민주주의 위기에 대한 절망적이고 파괴적인 대응.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같은 현상이 한국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정치인들은 다 똑같아"라는 냉소가 만연하다. 경제정책의 핵심은 이미 글로벌 시장이 결정하고, 부동산 가격은 해외 자금 유입에 좌우되며, 일자리는 다국적 기업의 전략에 달려 있다.
그런데 선거에서는 여전히 "우리가 바꿀 수 있다"라고 말한다. 이 간극이 클수록 시민들의 좌절감도 커진다.
그래서 한국에서도 "기존 정치를 다 뒤집어버리겠다"는 후보들이 인기를 끈다.
 
좌우를 막론하고 "기득권 타파", "적폐 청산", "리셋 코리아", "카르텔 해체" 같은 구호들이 힘을 얻는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하버마스의 분석은 현재 상황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다. 하지만 완전한 설명은 아니다.
 
왜 사람들은 미래가 아닌 과거를 그리워하게 되었을까?
왜 복잡성보다 단순함을 선호하게 되었을까?
왜 개방보다 폐쇄를, 다양성보다 동질성을 원하게 되었을까?
 
하버마스가 설명한 것은 "왜 기존 정치가 힘을 잃었는가"였다. 하지만 "왜 사람들이 특정한 방향의 대안을 선택하는가"에 대해서는 더 깊은 분석이 필요하다.
그 답을 찾기 위해서는 80년 더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1944년, 한 경제학자가 발견한 사회의 비밀스러운 법칙을 살펴봐야 한다.


다음 이야기: 1944년, 어떤 경제학자가 발견한 법칙

칼 폴라니(Karl Polanyi)는 『거대한 전환』에서 놀라운 발견을 했다.
 
시장이 사회를 완전히 지배하려 할 때마다 반드시 일어나는 일이 있다는 것이다.
 
19세기 영국에서, 1920년대 독일에서, 그리고 지금 전 세계에서 똑같은 패턴이 반복되고 있다.
마치 사회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본능적 반응을 보이는 것처럼.
폴라니가 발견한 "이중 운동의 법칙"은 현재 일어나는 "과거 회귀"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까?
그리고 이번엔 예전과 무엇이 다르며, 왜 더 극단적이고 위험해 보이는 걸까?


다음 편에서는 시장경제의 확장과 사회의 자기 보호 본능 사이의 영원한 갈등을 탐구해 봅니다. 왜 인류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지, 그리고 이번엔 정말 다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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