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가 성전에서 채찍을 들었다.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마태복음 21:13)

성전은 여전히 성전이었다. 제사는 계속되고 있었다. 율법은 지켜지고 있었다. 형식은 완벽했다. 그런데 예수는 분노했다. 본질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아내의 친구를 다시 생각해본다.

그녀는 여전히 사랑한다고 믿는다. 아내의 영혼을 구원하려는 것이 사랑이라고 확신한다. 전도하고, 기도하고, 교회로 초대한다. 형식은 완벽하다. 그런데 우정은 사라졌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마태복음 23:25)

바리새인들은 형식의 달인이었다. 손 씻는 법, 안식일 지키는 법, 십일조 드리는 법. 모든 것이 정확했다. 그런데 예수는 그들에게 화가 있다고 했다.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마태복음 23:23)

작은 채소의 십일조까지 정확히 계산했지만,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잃어버렸다. 형식은 지켰지만 본질은 버렸다.

오늘날 교회는 어떤가.

주일예배, 새벽기도, 금요철야. 형식은 넘친다. 그런데 사랑은 어디 있는가? 자비는 어디 있는가?

교회는 성장한다. 건물은 커진다. 교인은 늘어난다. 그런데 예수가 보면 뭐라고 하실까?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하실까, 아니면 "강도의 소굴"이라고 하실까?

민주주의도 마찬가지다.

선거는 정기적으로 치러진다. 투표율은 측정된다. 당선자는 합법적으로 선출된다. 형식은 완벽하다. 그런데 민주주의의 본질은 어디 있는가?

"너희는 나를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누가복음 6:46)

말로는 민주주의를 외친다. 그러나 행동은 독재를 닮았다. 다수가 되면 소수를 무시한다. 권력을 잡으면 반대자를 억압한다. 형식은 민주주의지만 본질은 독재다.

그렇다면 형식 없는 본질은 가능한가?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요한복음 3:8)

니고데모는 밤에 예수를 찾아왔다. 그는 형식을 다 갖춘 종교 지도자였다. 그런데 예수는 그에게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했다. 형식이 아닌 영으로.

성령은 형식을 따르지 않는다. 교회 안에만 있지 않는다. 기독교인에게만 임하지 않는다. 바람처럼 임의로 분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요한복음 7:37)

예수는 조건을 달지 않았다. 유대인이어야 한다고 하지 않았다.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하지 않았다. 단지 목마른 자는 와서 마시라고 했다.

사마리아 여인을 기억하는가?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요한복음 4:20)

그녀는 예배의 형식을 물었다. 어디서, 어떻게 예배해야 하는지. 예수의 대답은 놀라웠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한복음 4:24)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형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렇다면 개종 없는 구원은 가능한가? 형식 없는 사랑은 가능한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마태복음 8:10)

백부장은 이방인이었다. 유대교로 개종하지 않았다. 그런데 예수는 그의 믿음을 이스라엘 중 최고라고 했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누가복음 19:10)

예수는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러 왔다고 했다. 그런데 어떻게 구원했는가?

세리 삭개오를 보라. 예수는 그에게 회개하라고 하지 않았다. 성전에 나오라고 하지 않았다. 단지 그의 집에 머물겠다고 했다. 삭개오는 스스로 변했다.

혈루증 앓던 여인을 보라. 예수는 그녀에게 정결례를 행하라고 하지 않았다. 믿음 고백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녀가 옷깃을 만졌을 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했다.

형식은 중요하다. 그러나 형식이 본질을 죽여서는 안 된다.

아내의 친구가 진정으로 아내를 사랑한다면, 개종을 강요하지 않을 것이다. 함께 있어 주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그것이 어린 시절 그녀가 했던 일이다.

민주주의가 진정으로 모든 사람을 존중한다면, 절차에만 매달리지 않을 것이다. 서로의 목소리를 듣고 함께 가는 길을 찾을 것이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로마서 13:10)

바울은 말했다. 사랑이 율법의 완성이라고. 형식의 완성이 아니라 사랑이 완성이다.

개종 없는 구원이 가능한가? 나는 그렇다고 믿는다. 예수가 보여준 것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형식 없는 민주주의가 가능한가? 그것은 위험하다. 그러나 형식만 있는 민주주의는 이미 죽은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형식과 본질의 균형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사랑이 있어야 한다. 자비가 있어야 한다.

다음 편에서는 자비의 정치학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어떻게 우리가 이웃이 되는 민주주의를 만들 수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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